1980년대 초반, 컴퓨터 게임의 초기 버전으로 벽돌 깨기와 소위 숑숑이라 불리던 코스모 인베이더(cosmo invader)가 등장했다. 그 중 특히 코스모 인베이더는 하늘에서 포탄으로 공격하면서 내려오는 외계의 적들을 끊임없이 물리치는 단순한 게임이었는데, 당시 오락실 화면을 점령하다시피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우리나라 일부 외과병원의 대기실에서 코스모 인베이더를 연상케 하는 글귀가 눈에 띄곤 한다. ‘우리 병원은 비침습적인 치료를 지향한다.’는, 다소 낯설고 어색한 표어가 그것이다. 일상적으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 ‘비침습(非侵襲)’이란 ‘non-invasive’를 직역한 말이다.
일견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외과병원의 입장에서 이러한 글귀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의학과 의료라는 것은 인체와 질병에 대한 해석이다. 그 해석상 한의학과 서양의학이 다르듯이 서양의학 내부에서도 각과별로 견해 차이를 보이는데, 동일한 환자를 진단하더라도 내과의사는 내과적 처치로써 또 외과의사는 외과적 처치로써 해결하려는 경향은 어쩔 수 없다. 자기가 볼 수 있는 것만 보이기 때문이며, 대부분 자기가 알고 있는 방법으로 고치려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환자에 대해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 폭이 넓고 관대(?)하다.
이러한 성향은 내·외과의사뿐만 아니라 한의사와 치과의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자기 위주의 해석에는 생계라는 문제도 큰 작용을 하는데, 예를 들어 외과의사가 수술을 주저하고 내과로만 환자를 이송하면 그 의사는 뭘 먹고 살아가겠는가. 현대사회의 의사에게 환자의 입장이 되어 환자만을 위하는 역지사지(易之思之)의 고매한 인격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의사든 한의사든 단지 하나의 직업인일 뿐이다.
그렇게 다를진대, 외과병원이 침습적(侵襲的) 치료를 지양(止揚)하겠다니 얼마나 훌륭한 결단인가?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공격적인 치료를 가능하면 줄이고 최소한의 수술로, 더 나아가 비수술 요법으로 병을 고치겠다는 외과의사의 다짐은 양심선언처럼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는 환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하고 환자 위주의 의료를 펼치겠다는 의료인의 자세 전환을 천명한 글귀이다.
다시 말하지만 의학이란 ‘인체에 대한 해석’이다. 인간의 몸이란 조물주의 작품이라 몸 자체가 자연이고 하나의 우주와 같아 다양한 의학적 해석이 가능하다. 오늘날 현대의학을 주도하고 있는 서양의학도 본질적으로는 하나의 해석 방법에 불과하다. 서양의학에 의한 인체의 해석 방법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겸허하게 깨닫는 순간, 서양의학은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여 확장되는 곳은, 비유하건대 ‘몸의 여백’이다. 과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발달한 현대의 서양의학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절대시하므로 여백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고 알지도 못한다. 그래서 인정되지도 않았다. 동양화에서 볼 수 있는 흰 여백, 자연계의 빈 공간, 핵을 중심으로 전자가 돌 듯 우주의 빈 공간, 자연에 엄연히 실존(實存)하는 여백은 몸에서는 기(氣)나 에너지로 설명될 수 있다.
한의학에서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내재되어 있는 생명력을 무엇보다도 중시한다. 그것은 관절의 치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퇴행성관절염도 결국 눈에 보이지 않는 기력(氣力)이 약해져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보는 것도 이러한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서양의학은 퇴행성관절염의 눈에 보이는 현상, 즉 연골의 손상과 관절의 연조직 염증 현상에 주시한다. 그래서 인공관절 수술이나 스테로이드 혹은 강력한 항생제를 통한 염증 제거를 위주로 치료한다. 그러나 한의학에서는 어떻게 하면 관절을 튼튼하게 만들 수 있는가에 골몰한다. 관절을 튼튼하게 만들어 자연스럽게 퇴행성관절염을 극복하려는 방책이다.
튼튼한 마디의 꿈
질병의 사안이 위중하고 어떻게 치료하는 것이 최선일까 판단하기 힘들 때, 의사의 양심에 호소하듯 환자나 보호자들은 이렇게 묻곤 한다. “만일 의사 선생의 부모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정말로 양심적인 의사라면 이러한 질문에 다소 움츠려들지 않을 수 없다. 질병과 의학의 본질에 대해 깊은 성찰을 거친 의사라면 “내가 다 고칠 수 있다.”라고 함부로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치료의 가부에 대한 장담은 경솔한 것이지만 단 한 가지, 의료인을 떠나 인간적 양심을 걸고 확실하게 밝힐 수 있는 것이 있다. 만약 내 부모님이라면, 만약 나 자신이라면, 급한 수술을 요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비침습적 치료부터 먼저 받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의료가 이원화되어 한의사와 양의사의 견해가 심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러한 견해 차이가 사실은 많은 부분 오해와 편견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의료 소비자의 판단을 헛갈리게 한다.
퇴행성관절염의 치료에 있어서 가장 비침습적인 치료가 바로 한의학적 방법이다. 특히 마디를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교제를 이용한 보법을 위주로 치료하는 경우는 비침습을 넘어 오히려 몸 전체가 건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비침습적인 치료부터 받는다는 원칙에 입각하여 퇴행성관절염을 대처한다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잘못된 생활습관을 바로잡는다
→ 생활 속에서 관절에 무리를 주는 것을 파악하고 고치도록 한다. 비만도 큰 원인이 된다.
둘째, 운동을 한다.
→ 관절 주변의 연조직을 튼튼하게 만들어 퇴행이 진행되는 것을 막는다.
셋째, 한의학적인 치료를 받는다.
→ 침이나 뜸, 그리고 교제 등의 보법으로 관절을 자연스럽게 강화시킨다.
우리도 퇴행성관절염에 대해 비침습적 치료를 지향한다. 그러나 우리가 지향하는 바는 비침습적 치료를 넘어서는 개념으로, 바로 ‘보법(補法)’이다.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하게 들리겠지만, 한의학적 입장에서는 전통적이면서도 너무나도 당연한 치료법이다.
한의학에는 전통적으로 여덟 가지 치료 법칙이 있다. 물론 한의학에서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수많은 학자들의 노력에 의해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되었지만, 상한론(傷寒論) 치법을 중심으로 분류한다면 팔법(八法)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보(補)법이란 인삼이나 황기 등을 쓰는 경우를 말하는데, 소위 ‘보약’을 투약하는 치료법이다. 현대 서양의학은 그 학문의 특성상 보법이라는 치료법이 없으므로, 보법은 우리 한의학의 고유한 치료법이자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인체에서 교질의 쓰임은 다양하다. 그 중 몸과 기관의 형태를 유지하며 결합시키고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결합조직(connective tissue)의 주된 재료가 되기도 한다. 즉, 교질은 기관과 조직 사이에 있어 이들을 결합하고 받쳐주는 역할을 하는 결합조직의 주인공으로, 그 자체가 ‘생명의 물’을 품고서 몸속의 빈 공간을 보공(補空)하는 토(土)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교질 스스로가 빈 곳을 채우는 역할을 하다가 힘이 빠졌다. 특히 교질 다발로 구성된 관절의 연조직(軟組織)이 위축되고 약해져 퇴행성관절염이 생겼다. 뼈와 뼈를 잇는 마디로서 토의 역할을 하던 관절이 허약해졌다. 어떤 치법(治法)으로 접근하고 고쳐야 할까? 보법이 최선의 방법이다. 즉, ‘교제’를 보충하는 것이 교질로 이루어진 조직을 복구하고 힘이 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인 것이다.
퇴행성관절염에 있어서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치료법은 보법이다. 이는 몸에 손상을 덜 주고 치료하겠다는 비침습적인 치료보다 한 차원 상위의 개념으로, 보법의 구체적인 실천 방안으로는 다음 세 가지를 제시할 수 있다. 적절한 운동, 교질이 풍부한 음식의 섭취, 그리고 한방의 정통 명약 교제의 음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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